09년 1월의 남한행궁
남한행궁의 조성과 이용 남한산성은 1624년(인조 2) 7월에 쌓기 시작하여 1626년(인조 4) 11월에 완성되었다.
「광주행궁(廣州行宮)」 또는 「남한산성행궁(南漢山城行宮)」이라고 불리는 「남한행궁(南漢行宮)」의 건립 연대는 『중정 남한지』와 『광주부읍지』에는 1624년(인조 2)에 건립하였다고 되어 있으나 이것은 산성의 수축 시점을 말한 것이며, 행궁은 수축이 어느 정도 진행된 시점에서 건립이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성역 수축이 시작된 후인 1625년 6월 이후에 공사를 시작하여 1626년에 완성하였다는 『인조실록』3년 6월 23일 기사가 보다 정확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산성과 행궁이 완성된 후인 1626년 11월 광주부(廣州府)의 읍치(邑治)를 산성 안으로 옮김으로써 행궁은 광주부의 치소(治所)를 겸하게 되는 사실로서도
행궁의 조성이 전반적이고 장기적인 계획에 의하였음을 추측하게 한다.
남한행궁의 주요한 조성 목적은 국내의 환란이나 대외적인 침략에 대비하여 비상시에 군사적으로 이용하기 위한 것이었다.
또한 행궁 조성 직후 광주부 읍치를 겸하도록 한것 또한 남한행궁의 정치ㆍ군사적 중요성의 발로였다.
따라서 왕이 남한행궁을 이용하고자 한 경우는 군사적 목적을 띨 때이다.
이러한 본래의 조성목적에 의한 남한행궁의 이용은 조성 후 10년이 지난 1636년(인조14) 병자호란의 발발에 따른 것으로 자의반 타의반으로 이루어졌다.
인조 때의 병자호란 이후에는 광주부 읍치로서의 기능이 점차 강화되며, 왕이 행궁을 이용한 경우는 숙종 영조 정조 철종 고종 등이 여주의 영릉(英陵)이나
영릉(寧陵), 광주의 헌릉(獻陵)이나 인릉(仁陵) 등의 능행길을 오가는데 머물러 이용했을 뿐이다. 즉 왕이 이용한 것은 6회뿐이었지만,
이것은 여타 행궁에 비하여 많은 사용 횟수에 속한다.
머무르는 중에는 서장대(西將臺; 수어장대)에서 성조(城操)를 행하고 성을 순시하였으며, 군사지휘소인 연병관(鍊兵館)을 찾아 군사훈련을 실시하고 호궤하는 등
남한산성과 행궁의 군사적인 기능이 중차대함을 지속적으로 표현하지만 전반적으로 행정적 기능이 강화되어 나간다.
출처-문화원형백과